마침내 책장을 덮고 그제서야 나는 노트북을 열 수 있었다. 책 표지를 열었던 건 6년 전인데 말이다.
독서를 한참 쉬고 나서 긴 호흡의 책을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학기 중 독서를 거의 않다가 방학하고 처음 집어 든 — 이 책 바로 전에 읽었던 — 아가사 크리스티의 장편소설은 추리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나에게 독서란 것은 ‘몰입’의 순간을 거쳐야 비로소 전개되는 그런 것이다. 마치 게임에서 게이지를 가득 채우면 스킬이 활성화되는 것처럼, 독서 역시 꾸준히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몰입’의 단계phase에 도달하게 된다. 그 단계를 지나야 비로소 책 속에 빨려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순간부터는 꼼짝없이 낱장을 넘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리이자 임무가 된다. 잠깐 책을 덮어 놓고 다른 활동을 하더라도 책 생각에 잠긴다. 다른 활동이 끝나자마자 찾는 건 스마트폰이 아니라 책이다. 이 ‘몰입’의 단계를 거치면 뇌가 책을 우선순위의 최상단으로 세팅시켜 놓는 것 같다.
직전의 책에서는 끝내 ‘몰입’하지 못하고 짧은 호흡으로 여러 번 읽었다. 이번 책은 3일에 걸쳐 읽었는데 마지막날인 오늘에서야 몰입의 순간을 맞았다. 과거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집중력이었지만 그래도 무조건 끝내야 한다, 는 마음이라서 이만큼 왔다고 생각한다.
<코맥 맥카시 – 더 로드 (Cormac McCarthy – The Road)>
- 미국 현대문학의 4대 거장 중 한 명이자 동시대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인 코맥 맥카시의 2007년 퓰리처상 수상작
왜 무조건 끝내야 하는 책인데?
미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첫 학기 첫 과목은 문학Literature이었다. 지금도 생생한, 아주 나이스한 쿠로타 선생님Mr. Culotta과 옆자리에 앉았던 상냥한 켄지Kenzie. 아무튼 그 수업은 교과서보다 문학 작품을 주교재로 사용했는데 <위대한 개츠비>, <더 로드>, <노인과 바다>가 그 책들이었다(하나 더 있었나?). 셋중에서 제일 읽기 힘든 책은 <더 로드>였다. 나는 디스토피아나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를 워낙 좋아해서 제일 끌렸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때의 영어 수준으로 그 수준의 원서를 읽는 것은 고역이었다. 하지만 대체 이 책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건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그나마 쉬운 대화 부분을 중심으로 읽어가면서 소설의 줄거리를 캐치하려 노력했다. 앞부분을 다 읽지 못했지만 너무 궁금해서 결말은 읽었다.
세세하게 읽지도 못했는데도 그 소설은 재밌었다. 그래서 나는 반드시 한국어로 읽어서 내용을 이해하리라, 했었다. 그렇게 다짐만 하고 잊고 지낸게 6년. 그래서 이번에 학교 도서관에서 발견했을 때 망설임 없이 집어들었다.
이보다 선명할 수 없는 어둠
그 당시 읽기 힘들었던 이유를 책을 읽기 시작한 뒤 얼마 안되어 빠르게 납득할 수 있었다. ‘주철 쇠살대’ ‘내화벽돌’ ‘육분의’ 같이 한글로 읽어도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지 않는 단어들이 가득하다. 모르는 단어를 사전에 찾아가면서 적었는데 한 바닥은 나왔다.
진창: 땅이 질어서 질퍽질퍽하게 된 곳
수종: 물마루
지협: 두 대륙을 연결하는 잘록하고 좁다란 땅
일부를 옮기자면, 이런 단어들이다. ‘더 로드’를 걸어가면서 주위의 풍경을 묘사하는 것이 소설의 80%는 되니 지형에 관한 가능한 모든 표현은 나오는 느낌인데 덕분에 국어 공부 제대로 했다.
맥카시는 도저히 같은 일을 겪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 정도로 세세하게 행동을 묘사한다. 영화화할 때 감독은 정말 편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실제로 영화 스틸컷은 내가 상상한 모습과 일치한다. 끝나지 않는 잿빛. 남자의 기침 소리는 옆에서 들리는 듯하고. 파란 방수포를 덮고 웅크려 있는 두 사람.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 같니?”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우리는 핵폭발, 자연재해, 대지진 등의 대답을 내놓았던 것이 기억이 난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모두 불에 타고 재만 남은 세상에서 아들과 아버지는 끝없이 걷는다. 두 사람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더 이상 이름이 유효하지 않은 세계에서 ‘소년’과 ‘남자’는 ‘여자’의 기억을 뒤로 한 채 걷는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끝없이 이동하면서 정처 없이 걷는다.
희망 없는 땅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서로를 죽고 잡아먹는 식인cannibal 의 행태를 보인다(이 소설을 통해 나는 ‘cannibal’이라는 단어를 배웠다). 하지만 소년이 끝없이 아빠에게 되묻는 질문은 “우리는 좋은 사람이죠?” 남자는 말한다, 우리는 불을 운반하기 때문에 좋은 사람들이라고. 불로 타버리고 재만 남은 세상에서 역설적으로 그들은 불이 있어 살아간다. 불이 없음은 곧 추위와 죽음을 뜻하고, 불은 빛이자 희망. 그리고 남자가 운반하는 ‘불’은 사실상 아들이다. 소년은 밝게 발하며 인간성과 생존 의지를 다져 주는 존재(아니 이럴수가 점점 나도 모르게 수능문학처럼 해석하고 있잖아).
중간중간 남자의 독백을 통해 그의 절망과 혼란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속내를 내비치지 않다가 처음으로 속마음이 아들에게 튀어나오는 순간. 대부분의 순간을 소년이 아닌 남자에게 이입하면서,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타인에 대한 공포와 죽음과의 싸움 속에서 무거운 눈을 떴다. 죽음 같은 걱정을 읽는다.
남자의 삶의 방식은 ‘살아있으니까 산다’는 것. 삶을 포기한다는 것은 선택권에 없다는 것을 소년에게 끊임없이 인지시키면서. 중간에 나오는 노인도 모든 인류의 죽음이 더 좋을 것이라 말하지만 어쨌든 계속 걸어가지 않는가. 우리네 인생도 종종 ‘길’에 비유되곤 한다. 결국 다들 어떻게든 살길을 찾으며 앞으로 전진하는 모습은 종말의 끝에 선 인류도 마찬가지겠지.
결말은 최근에 본 영화 버드박스를 연상케 했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몇 살인지도 모르겠는 아들의 목소리는 나를 눈물 고이게 했고. 잊혀지지 않을 걸작.
그리고 이것저것
- 절망 속 태어난 소년의 세계에서 몇 안되던 행복의 순간, 코카콜라를 처음으로 먹던 장면, 식료품 가득한 지하 벙커를 발견하던 장면은 6년 전에 읽은 것이 기억이 났다.
- 여자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 순간에 놓여 본 적이 없는 사람의 주제 넘는 시선으로는 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끝까지 하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 총알 한 개는 어디로 갔는지? 맨 처음 셋이 있었을 때는(개를 잡으려 할 때) 총알이 세 개라고 나왔는데 말이다.
- 끝나고 작가 인터뷰를 찾아보는데 코맥 맥카시는 23세에 처음 문학을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올해로 23세가 되며 작가의 꿈을 아직 놓지 않고 있는 나로써는 희망찬 소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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