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헤밍웨이의 최후의 작품.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완벽한 성공’을 거둔 작품. 출판 직후 엄청난 상업적 성공이었을 뿐 아니라, 평단과 동료의 호평을 받고, 최고 권위인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을 헤밍웨이에게 안겨준 작품. 미드로 치면 ‘브레이킹 배드’ 같은 느낌.
이 책은 내가 약 10년 전 미국 고등학교에서 문학 시간에 한 학기동안 읽고 수업에서 토론하는 지정 도서였다. 그 때는 영어를 지금만큼 잘하지 못해서 영어로 읽자니 영 와닿지 않았는데, 이번에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책을 다시 보고 10년만에 (이번에는 한글로) 다시 읽었다.
두 눈을 제외하면 노인의 것은 하나같이 노쇠해 있었다. 오직 두 눈만은 바다와 똑같은 빛깔을 띠었으며 기운차고 지칠 줄 몰랐다.
고전 중의 고전, 교과서 같은 명작
우선, <노인의 바다>는 맘먹으면 하루에도 끝낼 수 있는 굉장히 짧은 소설이다. 이걸 한 학기동안 읽었다고?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지인 하나는 읽었는데 이게 왜 명작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단순히 읽으면 그냥 노인이 바다에서 낚시하다 고생하는 이야기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소설 뒤에 있던 작품 해설까지 읽고 곰씹는 과정을 몇 번 거쳐야 했다. 얼마나 명작인지 이제는 알겠다.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시대마다 새롭게 읽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즉슨 해석의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인간과 자연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헤밍웨이 특유의 문체와 많은 상징으로 담아 낸 클래식이다. <노인과 바다>는 책 속의 은유, 상징과 시대적 배경 그리고 헤밍웨이의 개인사를 알고 읽으면 소름이 돋는 대서사시 그 자체이다. 이 모든 내용을 개인이 파악하기는 어려운데 민음사의 버전에는 소설 끝에 영문학자이자 번역가인 김욱동 교수의 굉장히 길고 좋은 작품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거의 또 하나의 책으로 내어도 될 수준이라 적극 추천한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어.
주제 1.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어”
그래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뭔데? 바로 정신적 승리이다. 노인이 고기, 상어와의 지난한 싸움 중에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어.” 나는 이부분을 얕게 읽었는데 작품 해설을 보면서 그 참뜻을 알았다. 여기서 ‘파멸’은 육체적, ‘패배’는 정신적 개념이다. 노인은 물질적으로는 가난할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위축되지 않는다. 상어한테 죽는 한이 있더라도 고기를 버리지 않고 지키기 위해 싸운다. 어부로써의 자존심이다. 나도 소설 계속 읽으면서 느낀것이, 이사람 되게 강한 사람인데? 사흘동안 생고기 뜯어가며 고기와 사투를 벌이는 것도 그렇지만 그의 끊임없는 혼잣말에서는 희망과 인내, 낙관이 있다.
물론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그보다는 오히려 빈틈없이 해내고 싶어. 그래야 운이 찾아올 때 그걸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게 되거든.
1-1. 헤밍웨이 유니버스 알고 읽으면 감동이 두배
이 주제는 헤밍웨이의 인생사와 함께 읽으면 이제 감동의 도가니다. <노인과 바다>를 내기 전 그는 더이상 작품으로 호평을 받지 못하고 육체적 쇠퇴뿐 아니라 예술적 소진의 상태였다. 비평가들은 ‘헤밍웨이의 작가인생은 끝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헤밍웨이는 이 작품의 엄청난 성공으로 모든 명예를 되찾는다. 여든일 넘게 고기 하나 못 잡던 노인이 조각배만큼 큰 고기를 잡아 돌아오는 소설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걸 알고 나니 소름이 돋았다. 소설을 현실로 만든 헤밍웨이도 그렇고 노인 산티아고의 강인함도 그렇고 좋은 자극이 된다.
헤밍웨이의 완벽한 서사는 한가지 더 있다. 헤밍웨이의 초기 작품은 개인을 다루고, 다음에는 공동체의식으로 확장되고, 최후의 작품인 <노인과 바다>에서는 우주의 모든 개체와 종을 아우르는 자연관을 다룬다. 인간의 의식을 자연 세계로 확대한 소위 ‘헤밍웨이 유니버스’다.
그래서 그는 어느 누구도 바다에서는 결코 외롭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제 2. 결국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요즘 나는 “결국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걸 진짜 많이 생각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면서 배운 교훈 중 하나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따로 쓰기로..) 작품 해설은 이 작품의 제목이 <노인과 소년>이 아니라 <노인과 바다>인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중요한 부분이다. 괜히 더 쓸쓸해 보이는 이름 <노인과 바다>는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두번째 주제와 맞닿아 있다. 사실 노인이 혼자 낚시하며 고기와 싸우는 내용이 책의 70%라 개인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노인에겐 소년도 있고 그를 걱정하는 마을 사람들도 있고 노인 역시 끊임없이 그들을 생각한다. “아, 그 애가 지금 같이 있으면 좋았을텐데.”는 해설자의 말마따나 마치 돌림 노래 후렴처럼 반복된다. 소년 마놀린은 이 ‘인간의 연대의식’이라는 주제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이다.
“아, 그 애가 지금 같이 있으면 좋았을텐데.”
2-2. 그리고 이 책이 위대한 이유
그런데 재미있는 지점은 이 소설이 주제 ‘인간의 연대의식’을 말하는 방식이 사회를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미시적이라는 것이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출간하는 시점은 곧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데 바로 전세계 냉전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50년 초다.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격동이 있던 시기이다.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도 바로 수소폭탄 제조에 돌입한다. 남아프리카 백인 정권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시작했고 인도의 간디가 살해당하고 이스라엘이 세워진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바로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노인은, 그리고 그 노인을 관찰하는 이 소설은 전세계의 굵직한 사건에서는 관심이 없다. 오직 바다 한가운데 산티아고의 조각배에 집중한다. 책의 줄거리랄 것도 그냥 노인한테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 전부다. 다시 말하면 사소한 하나의 인간의 사건 하나를 가지고 육체적 – 정신적(주제 1), 개인 – 공동체(주제 2), 인간 – 자연(주제 3)와 같은 인류 모두에게 해당되는 보편적 주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이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 이라고 생각한다.
밤중에 돌고래 두 마리가 조각배 주위에 다가와 이리저리 뒹굴며 물을 내뿜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수컷이 물을 내뿜 는 소리와 암컷이 한숨을 쉬듯 물을 내뿜는 소리를 분간할 수 있었다.
“착한 놈들이지. 놈들은 함께 놀고 장난도 치고 사랑도 하지. 저 돌고래들도 날치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형제들이지.”
주제 3.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그리고 이 책이 교과서적 명작인 이유
이번에 읽으면서 이 책이 왜 미국 고등학교 문학 시간 선정 도서였는지 너무 잘 알겠다고 생각했다. 한국 문학이었으면 수능에 나왔다. 그 이유는 아주 큰 주제를 다루며 대립되는 개념과 상징이 명확하다. 내가 생각하는 세번째 큰 주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다.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젊은 어부들과 다르게 산티아고는 자연을 친구처럼, 그리고 어머니처럼 생각한다. 흔히 대지를 ‘어머니’로 비유하는 것처럼 산티아고는 바다를 ‘엘 마르’가 아닌 ‘라 마르'(여성형)로 부른다.(이 책이 수능에 나온다면 바로 이 부분이 별표 5개짜리임.)
고기를 작살로 꿰뚫는 세세한 묘사를 읽으면서 낚시가 잔인하구나 하는 생각을 한게 나만은 아닐 것 같다. 하지만 그는 고기를 형제처럼 사랑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떤 형태로든 다른 것들을 죽이고 있어.” 이제 이 부분은 훌륭한 토론 주제가 될 것 같다. 왜냐면 산티아고는 자연을 너무 사랑해서 자연의 법칙인 서로 죽고 죽이는 생태계 피라미드마저도 포용한다. 여기서 다른 입장은 비건의 입장이다. 자연의 생태계 피라미드는 어떤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개념이 아닌 것까지는 동의한다. 그러나 짐승과 인간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우리는 고차원적으로 생각하고 ‘공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물고기를 포함 생명이 있는 것은 먹지 않기에 산티아고의 입장과는 대립된다. 내가 문학 교사였다면 학생들에게 이 부분을 발제할 것 같다.
하지만 그들에게 저 고기를 먹을 만한 자격이 있을까? 아냐, 그럴 자격이 없어. 저렇게도 당당한 거동, 저런 위엄을 보면 저놈을 먹을 자격이 있는 인간이란 단 한 사람도 없어.
이 책이 교과서적인 부분을 더 말하자면 너무 많아 짧게 이야기하자면: 노인이 꾸는 ‘사자 꿈’의 의미, 작가의 서술기법 3인칭 전지적 시점이 주는 효과, 소설 속 기독교적 상징 등등이 있겠다.
마지막으로 다 못한 얘기들과 민음사 문학 해설에 대한 추천
앞서 말했지만 민음사 버전에는 번역을 맡은 김욱동 교수의 해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이 번역가가 해설을 썼기에 원서의 뉘앙스와 문법적 특징까지 설명해 주어 해설이 훨씬 풍부하다. 예를 들면 헤밍웨이 특유의 하드보일체를 설명하면서 그는 중문이 아닌 단문을 주로 사용하는데 원문을 보면 관계대명사가 전혀 없다는 내용이 그렇다. 헤밍웨이는 신문 기자 생활로 글쓰기를 배웠으며, 문장 쓰기는 ‘실내 장식’이 아니라 ‘건축’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책의 마지막에 있는 헤밍웨이 작가 연보 읽는데 아, 너무나 파란만장한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나와 너무 다른) 삶을 살았구나.
이탈리아 전선에서 두 다리에 중상. 아버지가 권총으로 자살. 아프리카 케냐에서 10주 사파리 사냥. 파리에서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친구 먹음. 네 번의 결혼. 제2차 세계대전 때 본인의 보트로 직접 독일 잠수함 수색. 아프리카에서 비행기 사고. 사망했다는 전세계 가짜 뉴스. 자택에서 자살.
한편의 대서사시 같은 그의 인생을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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