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중국 임시정부 탐방 기획 노트

중국 출발 D-14

다다음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진행하는 중국의 임시정부 탐방에 정말 영광스럽게도 함께하게 되었다. 다녀와서 작성할 2편의 기사를 기획하고 있는 중이며, 앞으로 2주간 최태성 강사님의 역사 교육(!!!)을 비롯해 몇 차례 일정을 거치면서 구체화될 것 같다. 설레면서도, 엄숙한 마음이다. 나는 ‘기자단’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번 탐방을 좋은 컨텐츠로 제작하여 더 많은 국민에게 내가 보고 듣고 온 것을 알릴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번 탐방을 준비하면서 얻은 정보를 두서 없이 써봤다.

 

우리나라 이름은 왜 ‘대한민국’이지?

‘일제의 침탈에 대항하여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우리 모두가 학창시절에 배운 상식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의 설립은 공식적으로 1948년 8월 15일이지만 헌법에 따르면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기 때문에 현대 민주주의 국가로써 한국의 시초는 임시 정부라고 할 수 있다. ‘임시 정부’라는 명칭 자체도 후에 붙여진 것으로 당시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했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하루 전, 독립운동가들이 국호를 논의하면서 신석우 선생이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고 제안하여 정해진 것이다. 그렇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이라는 명칭과 함께 ‘대한’제국을 계승하였고 지금까지 우리는 ‘대한’민국으로 불린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의 시초’다.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며 자국도 아닌 중국 땅에 정부를 설립하며 선조들은 이렇게 만든 대한민국이 100년 후에도 건재하리라 생각했을까? 우리 모두의 출발점이 된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우리는 얼마나 그들을 생각하고 있을까. 나 역시 임시정부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건 한국사 시간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다사다난해왔지만 일본에게 주권을 완전히 빼앗길 만큼의 대위기는 없었다. 그렇게 바람 앞의 촛불 같았던 국가를 되살렸던 독립운동가들을 보며 우리는 희망을 얻어야 한다. 적어도 올해만큼은 말이다.     

많이도 옮겨 다녔던 임시 정부

source: http://mehansa.com/p230/14762

러시아와 경성에 있던 임시정부를 상하이가 통합하면서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시작점은 상하이가 된다. 그리고 총 7번이나 옮겨 다녔는데, 1~2년 있던 곳을 제외하면 상하이(약 13년), 항저우(약 3년), 충칭(약 5년)으로 좁혀 진다.

그래서인지 이번 탐방 경로(두번째 사진) 역시 상하이(상해)에서 출발하여 항저우(항주)를 거쳐 충칭(중경)에서 끝난다. 국내선 비행기를 또 타야 한다니 역시 중국땅이 넓기는 넓다.. 당시는 비행기도 없었는데 선조님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1. 20박 21일간 4명이서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따랐다

오마이뉴스 로드다큐 ‘임정’

작년, 4명의 오마이뉴스 청년 기자들이 ‘대한민국 100년의 비밀을 풀겠다’며 배낭을 메고 20박 21일 동안 6800km의 길을 다녀왔다고 한다. 7편의 기사, 6편의 미니다큐, 1편의 장편다큐, 1권의 책이 제작되었으며 6편의 통합본인 장편 다큐는 유투브에서 위 영상으로 확인 가능하다. 카카오 스토리펀딩과 언론진흥재단의 후원을 통해 다녀오셨던데 영상만 봐도 그 고생이 엄청나고… 무엇보다 국가 차원에서 할만한 일을 개인들이 직접 기획하여 이렇게 알차게 다녀오신게 대단하다. 영상 첫 장면에서부터 알 수 있지만 그 부담감 역시 상당했을 것이다. 이번 탐방을 준비하면서 가장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다. 이분들이 내신 책 <임정로드 4000㎞>을 탐방 전 꼭 읽고 갈 생각이다.

관련 기사

탐방 다녀오신 김종훈 기자님 블로그

2. (유일한) 임시정부 브이로그

https://www.youtube.com/watch?v=rvVqz-9Yxoo&feature=youtu.be

유투브에 임시정부를 검색했는데 놀라울 정도로 관련 컨텐츠가 없었다. 유일하게 있던 영상이 중국인 유투버 분이 삼일절을 맞아 임시정부에 방문한 브이로그! 대략적으로 미리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당시 중국인의 반응에 초점 맞춰서 이야기해주시는데 임시정부가 중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이 상기된다. 별개로 가기 전에 중국어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중국어 공부 콘텐츠도 많아서 구독했다. 잘하고싶다………!!!!! 중국어……!!

3. 응답하라 1919! 당시를 재현한 한겨레 신문

일제의 총구가 불을 뿜어내는 와중에도 전국적인 배포망을 가진 유일한 신문 <매일신보>는 눈감고 귀닫은 듯 국장과 관련한 가십들만 쏟아내고 있다.

바로가기

이번에 한겨레에서 색다른 기획을 했는데, 1919년 당시라고 가정하고 그때의 일을 현재형으로 쓴 기사들을 묶은 ‘1919년판 한겨레신문’이다. 독자들이 재미있고 생생하게 당시의 역사 상황을 받아볼 수 있음은 물론이고 당시 우리 신문들이 언론 탄압으로 인해 쓰고 싶은 말도 속시원히 쓰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의미 있는 기획이다. 위에 인용했듯 매일신보 디스 같이 역사적 가정을 이용해 재밌는 컨텐츠를 만들어 냈다. 이거 기획한 사람 상줘야 한다.

그래서 나의 현재 기획은…

1. 한겨레의 기획이 정말 정말 인상 깊었다. 과거를 회고하는 박물관 같은 기획이 아니라 당시를 리얼하게 전달하는 느낌으로 가면 돋보일 것 같았다. ‘1919년으로의 시간여행’는 컨셉을 구상했다.

2. 임시정부가 처음 세워질 때 의원의 자격기준이 23세 이상이었다고 한다. 윤봉길 의사는 24살의 나이에 의거를 함으로써 중국에게 임시정부 지원을 받는 결과를 낳았다. 스물셋넷, 어려 보이지만 그 때는 결혼도 하고 나라를 위해 한몸 바칠 수도 있었던 나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또래들의 시점으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에너지와 희망을 전달하고 싶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멀게만 느끼지 않고, 우리의 뿌리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이다.

3.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대의원으로 당선되었고, 도산 안창호 선생이 “김마리아같은 여성이 열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다”고 말한 바 있으나 인지도가 낮은 김마리아 선생을 비롯하여 임시정부에서 대한의 부녀를 대표하여 활약했던 여성의원에 대해서 다루고 싶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여성의원은 총 7명. 그분들의 행적을 놓치지 않고 담을 생각이다.

Written by Blair

What do you think?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GIPHY App Key not set. Please check settings

더 강력해진, 홈페이지 업데이트

오늘부터 중국어 공부를 시작한다.(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