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은 주에 하필 급체를 했다. 음식 얘기만 들어도 토를 한건 처음이었는데, 음식은 꼴도 보기가 싫던 이틀간은 육식을 넘어 어떠한 음식도 입에 대지 않는 주인공에 더 깊게 공감할 수 있었으니 책을 읽기에 최악의 타이밍이었다고 해야 하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고 해야 하나. 책에 대한 나의 열정이 만든 메쏘드 리딩이었다고 포장해 두자.
2. 그런데 이 책은 채식이나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채식주의자>의 주제는 ‘폭력’이다. 한 평범한 여자가 어느 날 꿈을 꾸고 나서 채식을 시작하더니 점점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그녀의 남편과 가족들은 그녀를 바꾸려고 한다. 라는 이 줄거리에서 채식은 은유에 가깝고, 일련의 과정에서 주인공 영혜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태도를 행간에서 읽어낼 수 있다. 1장은 영혜의 남편, 2장은 영혜의 형부, 3장은 영혜의 언니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니 주인공인 영혜의 목소리는 책이 끝나기까지도 들을 수 없다. 1장, 2장, 3장 모두에서 영혜는 저다른 방식으로 폭력을 당하는데, 이 책에서 한 순간도 화자인 적조차 없으니 이 방식마저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책모임에서 첫번째 발제 질문 – “왜 상징이 ‘채식’이었을까요?” – 을 듣고 그제서야 그 의미를 연결지었다. ‘폭력’을 말하는 이야기에서 잡고 잡아먹는 동물의 본질을 거스르고 어떠한 폭력도 가하지 않는 태도인 채식은 참 적절하다(그리고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동물과 폭력은 떼어놓을 수 없는가?’로 이어졌다.). 한번도 가해자였던 적 없던 영혜는 어느 날 동물을 죽이는 생생하게 꿈을 꾸고(어떤 꿈들은 유독 생생하다.) 그 잔인함에 몸서리쳤을 것이다. 나에게 가해졌던, 잊고 살았지만 지워진 적 없었던 내재된 모든 폭력이 생생하게 떠올랐을 것이다.
4. 이 책에서 가장 선명하게 느껴졌던 문장은 234쪽에 있는 영혜의 목소리. “나는 당신을 몰라.” 이 부부들은 참 서로를 모른다. 1장에서 영혜의 남편은 ‘이 여자가 내가 알던 여자인지’ 자문한다. 2장에서 인혜의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도통 읽을 수가 없다. 3장에서 인혜는 자신은 남편을 모른다고 스스로에게 인정한다. 책의 주제가 ‘폭력’임을 생각했을 때, 그 밑바탕에는 ‘이해’가 없었다는 것이 솔직하게 드러난 이 한마디야말로 주제를 관통하는 문장이 아닐까. 모임에서 한 분이 “어떻게 남편조차도 영혜에게 꿈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무도 영혜를 이해해주지 않았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1) 영혜가 아버지한테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라는 말을 세 번 하는 동안 그 가족모임의 시퀀스 전체에서 단 한 명도 “왜?”를 물어보지 않는다. (2) 사장 부인의 질문처럼 사실 그녀에게 던져진 모든 질문들은 표면적이었다. 왜 채식을 하시나요? (“꿈을 꿨어요.” 남편에 의해 황급히 막아지는 말) 너 죽고 싶어? (“왜, 죽으면 안되는거야?”) 영혜는 그런 말을 많이 한다. “그러면 안 돼?” (3) 마지막으로 영혜는 (그나마 가장 그녀를 생각해주는)언니한테조차 이렇게 말한다. 언니도 똑같구나. 아무도 날 이해 못해.
5. 책모임에서 한 분이 압도적으로 재미있는 생각을 많이 던져 주셨다. 잊지 않고 싶을만큼 흥미로운 관점들이라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싶어서) 적어 본다. (1) 몽고반점은 형부에게 본인의 열등감에 대한 은유가 아니었을까 –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던, 어린아이처럼 살고 싶은 그에게 젊음의 상징을 아직도 갖고 있는 어른이란. 생활력 있고 현실적인 그의 아내에 대한 묘사가 ‘사랑’보다는 ‘경외’에 가까웠다는 것을 생각하면 꽤 맞아떨어진다. (2) 평범한 삶은 사실 얼마나 취약한가 – 영혜의 꿈을 기점으로 가족 모두의 평범한 일상은 깨진다. 그런데 그 평범한 일상은 겉으로만 잘 굴러갔던 것이 아니었던가. 인혜가 화자인 3장에서 고백컨대 인혜는 삶을 ‘살아온’ 적이 없고 ‘견뎌온’ 기억밖에 없다. 나는 이 부분을 생각하면 말을 잘 잇지 못하겠다. 당신은 정말 살아가고 있는지..? (3) 소수자에 대한 상징성 –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목을 받고 강제로 ‘변화’ 당하는 부분. 이 부분에서, 채식주의자인 친구가 “왜 채식하세요?”냐는 질문을 많이 듣는다고 덧붙이셨는데 – 외국 사회에서 채식을 한다고 할때 왜? 가 뒤따라오는 경우는 거의 없는 점을 생각하면(채식주의자가 너무 많으니까) 확실히 이 질문은 소수성에서 기인한다.
6. 책모임의 가장 큰 재미는 다른 사람의 얘기에서 – 내 생각은 미처 거기까지 닿지 않았던 – 새로운 점들을 찾고 연결하는 것이다. 아내를 ‘평범한 여자’로 묘사하는 남편에 대한 내 뒷담화(“어떻게 그렇게 사랑 없이 결혼을 하지?”)로 가볍게 말문을 튼 후 다양한 논점이 나왔다. ‘내가 영혜의 언니었다면 영혜를 놓아주었을까’는 꽤 생각해볼만한 질문인데, 한 분이 안락사, 연명치료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시켰다. 각자가 겪은 ‘인류애 상실’을 얘기하다 보니 동물-인간-사회로 확장되기도 했다. 마지막 발제 질문이었던 – 각자가 영혜에 대해 취한 태도도 달랐다. (‘존중한다’, ‘측은했다’, ‘공감했다’ 등등.) 나는, ‘궁금했다’. 영혜는 그 꿈을 꾸기까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떤 드라마를 보고 혼자 집에 있을 때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7. 개인적 감상을 좀더 얘기하자면 – 책에서 다양한 폭력의 양상이 그려지는데 그중에서 유일하게 눈물을 왈칵 쏟은 부분이 있다. 영혜가 어릴적, 아버지가 개를 잡아 먹기 전에 개고기를 연하게 만들기 위해 오토바이에 매달아 질질 끌고 개가 죽을 때까지… (책모임에서 이 얘기를 말로 꺼내기도 싫어 문장을 줄였다.) 우리집 강아지가 있는 본가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읽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상상하기도 싫은 잔혹함 속에서 나에게 떠오른 것은 강아지를 때리는 나였다. 강아지 훈육의 방식으로 손가락으로 코를 때리는 방법이 있는데, 한 성격 하는 바니가 코를 때리는 손을 물려고 할 때는 머리를 때릴 때가 있었다. 뭐랄까 나 자신이 타자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어떻게 내가 나보다 작은 생명을 때렸지? 영혜의 아버지에게서 느낀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 나에게로 확장되면서 그 미안함과 분노와 온갖 것이… 그 순간 휴대폰 메모장에 휘갈겼던 문장을 (지금 다시 보니 우스운) 아래 인용한다.
바니를 죽을때까지 때리지말것! 바니는 나보다 작잖아 나를 때릴수 없잖아
8. 최근 한국 Gen-z들 사이에서 ‘내가 얼마나 예민한지 테스트’가 유행했다고 들었다.(여기서의 ‘예민함’은 sensitiveness가 아니라, emotional intelligence에 가깝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쉽게 전이되고, 모임에서 누군가 소외되지 않는지 계속 배려를 해야 하고, 집단의 분위기를 잘 읽어내고 남들보다 눈치가 있는 이런 성격을 말한다.(아주 웃기고 적절했던 비유로는: 유퀴즈에서 게스트가 조세호를 안 보고 유재석만 쳐다볼 때 신경쓰는 성격) 영혜는 정말 예민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십수년 전의 가정폭력이 선명하게 내재되어 있던 사람. 보이지 않는 폭력이 공기 같은 사회를 살기에는 너무 온순했던 사람. 나무만 보면 어린아이처럼 밝아졌던 그녀가 어딘가에서는 나무로써 존재하기를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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